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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오늘 채널

예술 오늘 채널 - 고딕과 르네상스 알아보기!

안녕하세요! 예술 오늘 채널입니다. 오늘은 고딕과 르네상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딕과 르네상스 알아보기!

고딕과 르네상스 알아보기!

고딕은 전 유럽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반면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 국한되어 일어난 예술사조입니다. 고딕과 르네상스의 가장 큰 차이점이 고딕의 회화는 마치 정지된 화면을 옮겨놓은 듯한 이미지이며 인물들이 따로 떨어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의 그림은 배경과 인물 모든 부분이 결합돼 하나를 이룬 화면을 구성합니다. 르네상스 회화는 인간 신체에 대한 찬양과 자연스러운 생동감, 예술가의 개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1400-1500년 사이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중세인들의 의식세계

 중세인들은 원죄를 지은 채로 태어난 인간 육체에 대한 혐오가 팽배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죄악시 여겼습니다. 이는 아담과 이브가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 문헌은 대부분 사멸되었고 남아있던 라틴어 문헌들은 대부분 수도원이나 지식계층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인 발전이 부진했기 때문에 예술적인 활동을 장려할 만한 상인이나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아비뇽 교황청

 이 세 가지 현상은 중세인들로 하여금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이 이루어 놓은 예술활동을 외면하거나 혐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리하여 많은 유산들이 훼손되거나 망실되었습니다. 실제로 아비뇽 유수로 인해서 로마는 폐허가 되기도 했습니다.

변화하는 중세 후반의 유럽 사회

교황의 권력이 조금씩 약해지면서 군주들이 교황권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를 벌이면서 지식인 사회가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신앙, 한 명의 교황, 라틴어로 표준화되어 있었던 양식을 벗어나 다양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헨리 홀리데이 - 베아트리체를 만난 단테(1883)

예를들어 피렌체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는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방언으로 신생, 신곡 등의 서사시를 창작했습니다. 또한 여기서 영원한 구원의 여인상이 성모 마리아가 아닌 인간 여성인 베아트리체로 표현했습니다. 또 다른 변화의 바람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인해서 그전까지 국가의식이 희미했던 영국과 프랑스인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중세 시대까지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권과 경계는 다소 모호했다고 합니다. 최초의 영국 왕인 노르망디 공이었던 윌리엄 1세의 즉위 이래 영국 궁정은 계속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노르망디의 지배권 역시 영국 왕실에 있었습니다. 백년전쟁의 발단은 노르망디와 플랑드르 지역의 지배권 다툼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플랑드르의 발달된 방직 산업 기술을 가지기 위해서는 영국이 플랑드르 지역을 소유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

영국은 당시 뛰어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년전쟁 초기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만 명 이상 전사하는 열세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세밀화

하지만 뜻밖에도 성처녀 잔 다르크에 의해 프랑스군은 오를레앙과 랭스를 수복하게 되고 그녀의 등장과 함께 전세는 프랑스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1453년 결국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오늘날 까지도 잔 다르크는 프랑스 애국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인들은 양국 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각자에게 국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각 국의 루이 11세와 헨리 8세라는 강력한 전제군주가 나타나게 됩니다.

백년전쟁이 가져온 사회적 변화

1400년대 후반 ~ 1500년대 전반에 걸쳐 영국,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이 각기 하나의 국가로 기반을 닦았고 자신들의 위세를 드높이기 위한 큰 건축물과 각각의 화풍을 담은 그림을 제작하게 됩니다. 군주들은 자신의 이미지 강화를 위해서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육성하는 새로운 경향이 유럽에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