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오늘 채널 - 페르시아 전쟁 후일담 알아보기!
안녕하세요! 예술 오늘 채널입니다. 오늘은 페르시아 전쟁 후일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후일담!
이렇게 해서 제2차 페르시아 전쟁도 제1차 때처럼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정도 규모의 대전쟁은 서양에서는 사실상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성공했으니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갖는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승리를 자유주의가 동방의 전체주의에 대해 거둔 승리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플라타이아 전투 후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붙었던 테베를 아주 죽여 놨습니다.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력 증강 이래 어마어마한 수군 활용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선 가장 큰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선박 술과 해전술도 독보적이었습니다. 아테네는 단순히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낸 데서 만족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팽창 과정에서 빼앗긴 소아시아의 식민도시들을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때마침 페르시아 위세가 약해졌다고 판단한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에 독립을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테네는 소아시아 이오니자 지역 도시국가들의 독립을 지지한다며 해군을 파견해주었습니다. 이 전투가 미칼레 전투인데 아테네가 해군 지원을 해주자 이오니아 지역의 도시국가들이 너도나도 동시에 일어나 반란을 일으키며 아테네와 합류해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뤘습니다.
이 전투는 칼리아스 화약으로 완전히 종식되기 전까지 약 30년간 계속됐습니다. 물론 페르시아 측의 일방적 패배였습니다. 아테네에게 명분이 있었습니다. 동방의 외국인들에게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구원해주자며 아테네는 인간 아티카 반도의 폴리스들과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 동맹이 델로스 동맹입니다. 델로스 동맹 폴리스 국가들은 그 본부와 동맹 기금을 델로스 섬에 두었다고 해서 동맹 이름을 델로스 동맹이라고 했습니다.
아테네는 이오니아 지역 도시국가들의 독립을 도와주겠다면서 적극적으로 이오니아 지역에 해군을 파견하는데 점차 양상이 아테네가 그 폴리스들을 재식민지화하는 듯했습니다.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는 물론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세력 확대했고, 이는 흡사 제국주의와 비슷했습니다. 물론 그럴수록 아테네의 재력과 국력은 날이 갈수로 고 튼튼해지고 풍요로워졌습니다. 한편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전쟁 후 방탕한 생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쿠데타라 일어났고 암살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라미스 해전의 주인공,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테네가 해상제국이나 다름없는 세력을 불려 나갈 수 있던 배경에는 테미스토 클래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유능한 사람은 참주 할 가능성이 있다며 국가에서 추방시켜버리는 도편 추방 제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국민적 영웅이 된 테미스토 클래스에겐 그를 시기 질투하는 정치적 정적들이 급격하게 불어났습니다. 결국 테미스토 클래스는 도편 추방에 선정되어 국외로 추방당했고 심지어는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억울한 누명까지 써져 오명 속에 내쫓겨버렸습니다. 분통 터진 테미스토 클래스는 누명대로 페르시아로 망명해버렸습니다. 페르시아는 그걸 또 받아줬습니다. 확실히 페르시아가 대제국은 대제국인 듯합니다.
페르시아 측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앞세워 아테네 정벌을 준비하려다가 테미스토 클래스가 끝까지 거부하다가 음독자살을 했다는 설과 그냥 편안하게 페르시아에서 자연사했다는 설로 나뉘어 사망설이 분분하답니다. 정치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아테네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테네는 완전히 다른 시대로 접어들고 아케익 시대에서 이른바 고전기로 넘어가게 됩니다.